World View on Islam Korean Language 이슬람의 세계관 Iseullam-ui Segyegwan
World View on Islam in Korean Language 이슬람의 세계관 Iseullam-ui Segyegwan
The Muslim Converts Association of Singapore
번역: 후세인 크르데미리
교정: 카람
이슬람의 세계관
도입
World View on Islam Korean Language 이슬람의 세계관 Iseullam-ui Segyegwan:
셀 수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아마 한번쯤은 이런 의문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세상은 그리고
우주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해도 되는 것인가? 내가 죽은 다음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또 우리 모두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들은 인생과 그 의미, 그리고 인생의 목적에 대한 의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 우주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존재와 위치에 대한
의문이기도 합니다.
세계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여러분의 세계관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세계관이란
한 사람이 세상과 그 안에서의 자신의 존재와 위치에 대해 바라보고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세계관은 여러분의 사고방식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세계관은 여러분의 삶의 질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인류는 지난 오랜 동안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고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현재
인간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 것인지 등 세계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암흑과 악의 세력이 판치는 지옥과 같은 곳으로 생각합니다. 이 같은
세계관을 가진 사람의 삶은 미신과 두려움에 의해 지배되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이 밝고, 풍요로우며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지구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앞으로 이 세상에 어떤 일이 닥칠지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단지 먹고 마시며 인생을 ‘최대한’ 즐기려 하며 마냥 행복해합니다. 간혹 인생이나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저 살다 죽을 뿐이고,
죽는 건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주를 선과 악, 빛과 어둠, 그리고 긍정과 부정이 싸우는 투쟁의 현장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한 예로 일부 중국인들에게는
음양 사상이 있습니다. ‘양’은 빛과 열, 그리고 선을 의미하며,
‘음’은 어두움과, 차가움, 그리고 습하고
악한 것을 의미합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일부 종파가 주장하는 바는,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아베스탄어로 창조되지 않은 조물주 즉 신을 뜻하며 조로아스터가 주장하는 신의 이름)라는 선한 힘이 있어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 아베스탄어로 조로아스터교에서 말하는 ‘파괴적인 영혼’)라는 악한 힘과,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서로 싸운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조물주 또는 우주의 창조자, 혹은
신(하나님)을 믿는 종교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하기도 합니다.
각 종교들마다 신의 본성은 사뭇 다릅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하나님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으며 다른 누구와도 그 힘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이 절대자를 다른 신이나, 악마, 신령 등과 결부시키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신에 대한 믿음에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이나 절대자에 대한 생각들이 인간 자신의 상상력의 소산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위해 어떤 것이 최선인지를 결정할 힘과 권한이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무신론자,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또는
인간중심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불가지론자는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신의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무신론자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중심주의자는
(무신론자일 수도 있고 불가지론자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하늘의 섭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만이 인간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인간중심주의로 전향함과 동시에 그 상당수가 세상과 인간의 존재를 이해함에 있어 “과학” 및 과학적
방법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들은 과학이 그 어떤 것보다 정확하고 분명한 것이라는 인식 하에 정보 수집,
실험, 관찰 및 유추 등의 과학적 방법으로 지식을 얻고, 과학이야말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에 의존하기도 하는데 특히 번민과 고통의 시간에 그러합니다. 또 다른 의문들에 대해서는 점성가나 주간지의 운세, 유명한 무당으로부터 해답을 찾거나, 혹은 마르크시즘 같이 당시에 유행하는 사상에 의존하기도 하고, 또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는 과학에 호소하기도 합니다.
진실과 거짓
다양한 세계관에 대한 이 짧은 고찰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대체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데 있어 확고한 체계 없이 혼돈의 상태에 빠져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곳이 어딘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암흑 속에 무리 지어 있는 군상들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가려낼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분명,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방법들이 모두 옳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일부는 서로 공통점을 갖기도 하지만, 각각의 세계관은 엄밀히 말해 서로 각기 다른
성격을 갖습니다.
각각의 세계관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 진실을 설명하고 있으며 적어도 합리성이
뒷받침 되는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가?
우리는 거짓되고 이성과 논리가 뒷받침 되지 않은 세계관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 전체적인 현실에 대한 설명이 가능한가?
현실의 일부에 대한 설명이나 지식만을 제시하는 세계관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 적어도 인간과 관련해서, 해당
세계관이 인간의 욕구와 잠재력을 충족시킬 수 있는가?
❖ 지침으로 삼을 만한 적절한 가치와
타당한 목적을 제공하는가?
인간의 삶을 구체화한 세계관들 중 어떠한 것이 타당하고 합리적이며, 완전하고
또 논리적으로도 만족스러운지 지금부터 차근차근 점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과학 – 제한된 세계관
제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자신의 힘으로 세계의 기원과 인간의 위치, 그리고
인생과 운명에 대해 완전하고도 타당하며 만족스러운 답변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예로, 수세기에 걸쳐 과학자들이 축적해 온, 세계와 우주에 대한 모든 지식들은 현실의 작은 부분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많은 과학자들이 이렇게 말해야 할 때가 올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모른다.” 과학의 견지에서 볼 때 우주는 그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가 없어진 오래된 책과도 같습니다. 그 처음도 끝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과학의 세계관은 전체가 아닌 일부의
지식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말은 널리 통용되고 있으며, 우리에게 우주의 일부 현상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 전체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그 기원과 운명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세계관은 장님들이 코끼리를 부분적으로 만져보고 얻은 지식과도 같습니다. 코끼리의
귀를 만진 사람은 이 동물이 부채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할 것이요, 다리를 만진 사람은 기둥과도 같이
생긴 동물이라고 할 것입니다. 흔히들 과학이 긴 겨울 밤의 강력한 탐조등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 빛으로 작은 부분들을 비출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 불빛이 닿는 한계를 벗어나서는 그 어떤 어둠도 밝힐 수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사항은, 과학이 쓸모 없는 것이라고 지적하고자 함이 아니라 단지 과학에는
그 한계가 있음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이성의 힘
진실하고 타당한 세계관을 찾는 우리에게 다행인 것은 인간이 특별한 능력을 선사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성과 논리의 힘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능력 자체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정밀 저울로 금의 무게를 달 수
있을지언정 그것으로 산의 무게를 잴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이성을 적절히
활용하여 이 세상에서의 우리 존재와 그 위치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어떤
세계관이나 이론이 그릇되고 부적절한지를 판가름하는 데에는 이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 장의 첫머리에 열거한 의문들 중 가장 중요한 질문에 답하는 데 이 이성의 힘을 활용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물음 말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것에는 그 시작(출발)점이
있으며, 이 시작은 다음의 세 가지 경우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아무 것도 없는 상태, 즉, 무(無)에서 창조되거나 기원되었다.
2. 스스로 창조된 경우.
3. 그 자신이 아닌 외부의 창조자 또는 원인이 존재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설명은 명백히 불가능합니다. 무(無)에서 어떠한
것이 비롯되거나 창조되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또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도 인지(人智)를 초월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은 스스로 창조되었거나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론은 분명합니다.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은 조물주나 외부의
창조주로 인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일부인 여러분들도 그러한 창조주 덕분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로부터 진화했다거나 물에서
기원했다거나, 혹은 빅뱅이 있은 후 갑자기 모든 것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는 등의 설명은 우주와,
인간을 비롯한 그 안의 모든 피조물들의 기원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주의 조물주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세계관은 잘못된 세계관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조물주의 본성은 무엇인가?
조물주는 모든 피조물들과는 다른 본성을 지닌 존재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조물주가 피조물들과 같은 본성을 지닌 존재라면, 그 역시 시간상의 출발점을 갖는 유한한 존재로서 그 역시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상의 출발점을 갖는다” 라는 말은 “일시적(시간상으로 유한한)”인 존재란 뜻입니다.
만일 창조주나 조물주가 일시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영원한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영원하다는 말은 곧 시작도 끝도 없다는 뜻입니다. 조물주가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하다면,
그는 어떤 것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그를 존재하게 하지
않았다면, 조물주 그 자신 외에는 그를 존재하게 한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그는 자생(自生)적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자생적이란,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사람이나 물체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존재함에 있어 다른 것을 필요치 않는다면, 그는
곧 끝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조물주는 영원무궁한 존재인 것입니다.
만일 조물주가 영원무궁하다면, 그의 모든 속성들도 영원하고 무궁함에 틀림없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한 예로 조물주가 강력한 존재라면 그는 언제나 강력할 것입니다.
그 강력함에는 그침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전지(全知)한 존재라면,
그는 항상 전지할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현명함이 있다면, 그 현명함도 항구적일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자애롭고 공명정대하다면, 그는 언제나 자애롭고 공명정대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즉, 조물주는 그의 그러한 속성 중 일부를 잃거나 새로운 속성을 갖거나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영원불변하고 항구적인 이러한 특성들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World View on Islam in Korean 이슬람의 세계관 Iseullam-ui Segyegwan
<유목민> 한 사막의 유목민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막에서 발견되는 낙타의
털과 배설물들은 낙타가 지나갔음을 가리킵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을 보면 나그네가 지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별이 가득한 하늘, 산과 계곡이 있는 대지,
그리고 파도 치는 바다 – 이 모든 것들이 그것을 만드신 분, 전지전능하시고
인자하시며 자비로우신 조물주를 가리키고 있지 않겠습니까?” |
<무신론자> 자으파르 앗-싸디끄(Ja’Far As-Saadiq)이라는 한 지도자와, 공공연히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는 학자 사이에 있었던 대화입니다. 자으파르가 무신론자에게 물었습니다. “바다를 여행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네.”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럼요. 하루는
우리가 바다에 있었는데, 무시무시한 태풍이 불어 우리 배를 덮쳤습니다. 몇몇 선원들은 그 자리에서 죽었지요. 나는 뗏목에 매달렸지만, 그것도 곧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여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로
던져졌고, 결국 나는 파도에 휩쓸려 해안에 닿게 되었죠.” 이에 자으파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폭풍이 일었을 때 당신은, 처음에는
배에 의지했다가 다음에는 선원들이 구해주길 바랐고 다음에는 잠시나마 당신을 구해주었던 뗏목에 의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마저 없어졌을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저 죽음 앞에 자포자기 하셨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셨습니까?” “그야 물론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랬죠.” “누구를 향해 그렇게 기원하셨습니까?” 자으파르의 물음에 그 사람은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자으파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그 때 당신이 의지하게 된 분이 조물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익사직전에 구해주신 분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날 이후 그 무신론자는 더
이상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
<뽕나무> 유명한 법학자인 이맘 앗-샤피이(Imam
Al-Shaafi)에게 누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가 대답하기를, “뽕나무 잎을 보십시오. 그 색깔, 냄새, 맛, 그리고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저와 당신에게
똑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누에가 그 뽕잎을 먹으면 비단실이 나오고, 벌이 먹으면 꿀이 되어 나옵니다. 양이 먹으면 똥이 되어 나오고, 영양(羚羊)은 뽕잎을 씹어 사향내를 냅니다.
이 똑같아 보이는 뽕잎으로 이런 여러 가지를 만들어내시는 분이 도대체 누구시겠습니까?” |
<요새> 또 다른 유명한 법학자인 아흐마드 이븐 한발(Ahmad Ibn
Hanbal)에게도 누군가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기 강하고 고요한 요새가
하나 있습니다. 완전히
막힌 성이어서 문도 창도 없습니다. 바깥은 하얀 은처럼 보이고 안쪽은 순금처럼 보입니다.
이런 상태였던 요새가 갑자기 금이 가면서 부서지기 시작하더니 보고 들을 수 있는 한 생명체가 나타났습니다.
아름답고 경쾌한 소리를 내는 생물입니다.” (이는 달걀과 병아리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한 것입니다.) |
만일 조물주가 전지전능하시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또 다른 비슷한 능력을 가진 조물주가 있어 어떤 것을 만드는 데 견해차가 생긴다면, 다음 둘 중 한 가지가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이겨 후자가 전능하지 못한 존재가 되는 경우와 둘째, 서로를 무력화함으로써
둘 다 그 능력에 한계를 갖게 되는 경우, 이 두 가지입니다.
만일 어떤 것을 만들 때 두 존재가 서로 합의하거나 서로에게 보완적인 존재가 된다면, 둘 다
모두 전능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다른 한 쪽의 간섭을 받아들여야
하거나, 다른 한 쪽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둘 모두는 잉여적인 혹은 제한적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물주는 하나여야 합니다. 그와 대등한 존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조물주는
유일무이한 존재여야 합니다. 조물주는 전능해야 하며 그의 의지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조물주가 영원무궁하고, 자생적이며, 전능하고, 유일무이하다는 말은 타당하고도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마음속에 떠올리는 조물주의 속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또 그의 속성과 특질들이 절대적이며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조물주와 피조물들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생기게 됩니다. 즉 어떠한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아들도 딸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태양과,
달, 별, 그 외 다른 어떤 천체(天體)도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산, 나무, 불 그 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이
될 수 없으며 신으로서 숭배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나 피조물의 일부를 신으로 믿는 종교나 세계관도 잘못된 종교요, 세계관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의 특징을 갖는 것으로 간주하는 종교나 세계관, 예를 들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거나 피로함을 느끼고, 쉬거나 자야 할 필요가 있는 존재로 묘사하는 종교나 세계관은 모두 그릇된 종교요,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함에 대한 선언> “말하라 :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단 한 분이시라. 모든 필요를 초월하시는 하나님. 그분은 낳지도 않으시고 낳아지지도 않으셨으며 그분과 비슷한 것은 단 하나도 없노라.’” (꾸란 제 112장{이클라쓰} 1-4절) |
우리가 여태까지 논의한 바를 생각해 보고 또 앞으로 개진할 내용들을 살펴보면, 조물주의
존재와 그 능력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타당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의지와
은총, 즉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보호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하나님의 섭리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삶의 모든 혜택들에 대해 조물주에게 감사 드리고 그러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그분
이외에는 경배 받을 존재가 없노라.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을 아시는 분. 그분은 가장 자비로우시고 가장 자애로우신 분이시라.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그분 이외에는 경배 받을 존재가 없노라. 왕이시며 성스러운 분이시며 그 어떤 결점도 없으신
분, 안전을 주시는 분이시며 지켜보시는 분이시며 가장 존엄하신 분, 강제하시는 분이시며 홀로 위대하신 분. 그들이 감히 그분께 대등한 존재를 둠에 하나님 찬미
받으소서!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창조자이시며 창조를 시작하시는 분이시며
형상을 부여하시는 분이시라. 그분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이 있노라. 하늘들과 대지에 있는 것들이 그분을 찬미하며 그분은 가장 존엄하시고 가장 현명하신 분이시라.” (꾸란
제 59장{하슈르} 22-24절) “하나님, 그분 이외에는 경배 받을 존재가 없노라.
살아계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졸음도 잠도 그분에게 다가가지 못하노라.
하늘들에 있는 모든 것과 대지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라. (심판의 날)
그분의 허락 없이 그분 앞에서 다른 이를 중재할 수 있는 자 누구뇨. 그분은
그들(피조물들) 앞에 있는 것과 그들 뒤에 있는 것 모두를 알고
계시노라.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지식에 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하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우는 예외라.
그분의 쿠르시(의자)는 하늘들과 대지 모두를
아우르도다. 그리고 그분은 그 모두(하늘들과 대지)을 보호하심에 피곤함을 느끼지 않으시노라. 그리고 그분은 가장 높으신 분이시며 가장 위엄하신
분이시라.” (꾸란 2장{바까라} 255절) |
타고난 내재적 가치
창조에 대해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이 특정한 내재적 법칙과 규범에 따라 창조되었음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인간은 조물주로부터 선천적인 지식과 가치를 부여 받고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재적 가치가 선천적인 도덕관념을 형성하여, 예를 들어 진실을 말한다든지,
약속을 지키는 일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 일 등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도덕적 관념은, 거짓말을 한다든지 속이고 거만한 행동을 하는
것 등이 도덕적으로 나쁘고 그릇된 것임을 가려낼 수 있게 해줍니다. 한 어린이가 다른 어린이에게 “뭐야,
너 약속했잖아!” 라고 말하는 것이나, 깡패들에게
“다른 사람이 너희들에게 이런 짓을 하면 좋겠어?”라고 대드는 것 등은 모두 이러한 규범과 가치에 호소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 예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정직함과 공정함 등의 가치는 전 세계의 누구나가
인정하고 공감하는 것인 바, 이는 모든 사람들이 특정한 교육 없이도 날 때부터 그 가치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성적인 도덕관념은 조물주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지침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알아볼 수 있는 양심을 주셨고, 사유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는, 사유하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능력과 은총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암호들로 가득 찬 한 권의 책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계시와 예언자
그러나 이 암호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지식을 제시하셨고 한층 더 특별한 방식으로 그분과 소통하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류 창조
이래 몇몇 사람들을 선택하시어 그들에게 영감을 부여하셨고 그들을 통해 인류에게 메시지를 보내오셨습니다. 이들은
인류의 진정한 지도자들로서, 하나님의 예언자 혹은 사도(使徒)라 불립니다.
그럼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예언자이고
그들이 하는 말들이 꾸며낸 말이 아닌 진실인지를 알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해왔고 현재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진정한 예언자와 허풍쟁이, 협잡꾼들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가 예언자가 틀림없다고 단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본래 그대로의 메세지인지, 아니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왜곡되거나 바뀐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쯤에서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성스러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책이나 문서들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하였다고 합니다. 힌두교에는 베다(Vedas)와 바가바드기타(Bhagawat Gita)가 있고, 조로아스터교에는 아베스타(Avesta)와 그
다양한 판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와 일부 유대교에는 다양한 판본들로 사용되는 성경이 있습니다.
일본의 신도교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슬림들에게는 꾸란이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소위 ‘성스러운 책’들로는 시크교의
아디 그란트(Adi-Granth), 미국 말일성도교의 모르몬 경전 등이 있습니다.
진정한 성서의 기준
이 같은 기존의 문서들이나 책들 중 어떤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진정한 성서인지를 가려내기 위해
우리는 이성과 논리를 이용해 볼 수 있습니다. 단, 하나님의 속성이 절대적이며 하나님은
우주에서 유일무이하게 전지전능한 조물주라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겠지요.
성서가 진실되고 거짓이 아니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메시지이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메시지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정한 기준들을 논리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하나되심과 배치되는 어떠한 속성도 하나님에게 부여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예전에는 사람이었다거나 혹은 다른 신, 또는 여신이 하나님과 함께 존재했었다거나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악한 존재가 있다고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2.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인간에게 부여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알 수 있거나 혹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되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해서도 안됩니다.
3. 조물주인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경배 받거나 섬김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4. 성서의 어떤 부분도 성서 내 다른 부분과 모순되어서는 안 됩니다.
5. 성서에서, 믿는 자들을 인도할 임무를 부여 받은 예언자가 중죄나 심각한
악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선택하시는 데 신중하지 않다거나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따를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6. 성서를 계시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사악함이 없어야 하고, 그는
중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며 전적으로 정직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 사람들에게 어떠한
보상이나 혜택을 요구하는 사람이어서는 안됩니다.
대부분의 경전은 위의 기준들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류, 우주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주장들이 담겨있지만 이러한 경전들은 다소 판타지적인 용어들을 길게 나열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런 경전들에 대해 자세히 고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꾸란은 위의 기준들에 부합하는 유일한 성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본서를 통해 검증될 것입니다.
다른 경전들은 왜 이 기준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과
그 분의 피조물에 대해 불합리하고 근거 없는 이야기들만 늘어놓고 있는 ‘성서’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책들은 원시적인 시대에 살던 무지한 인간이 쓴 것이기에 그런 걸까요?
그러나 꾸란을 살펴보면, 인류는 실제로 태초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지식과 가르침을 받아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은 “그리고 그분께서 아담에게 그 모든 것들의 이름을 가르쳐주신 후 천사들 앞에 그들을 제시하며 말씀하시기를 ‘만약 너희들의 말이 옳다면, 나에게 이것들의 이름을 말해보라’ “(꾸란 제 2장 31절)” 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가장 은혜로우신 분인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에게 표현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으며,” (꾸란 제55장 3~4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시 종교?
태초의 인간이 태양이나 나무와 같은 자연물을 숭배하는 등 무지하고 원시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명해져서
그러한 믿음들을 버리고, 유일신 또는 “높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태초의 인간들이 원시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생존하기 위해 그들이 사용했던 도구나 기술들에게나
적용되는 것입니다. 발달된 기술이나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오히려 세계관이나 신념에 있어서 이전 세대보다 더 무지하고
제한적이며 창조 당시의 순수한 상태에서 멀어져 그릇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가 한 개인에 대해 말할 때, 그가 동굴에 살고 있는지 유리와 철강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의 꼭대기 층에 살고 있는지, 혹은 농작물을 수확할 때 낫을 쓰는지 아니면 전자동 수확기를 쓰는지, 요리할 때 나무를 떼는지 전자레인지를 쓰는지, 활과 같은 무기를 쓰는지 아니면 레이저 광선을 쓰는지 등은 그렇게 중요한 평가요소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선천적인 도덕관념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순수한 태초의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지의 여부입니다.
지식과 인간의 역사
진정한 성서와 거짓된 성서에 대한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봅시다. 진정한
성서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꾸란을 통해 우리는, 태초의 인간이 아담이었으며 그는 예언자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만큼 하나님과 창조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지하지 않았습니다. 현 시대의 인류 구성원들은 그의 자손들입니다. 아담의 후손 중 일부는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따랐지만 다른 후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부는 새로운 것들을 추가하고 또 어떤 일부는 본래의 가르침을 변경하였습니다. 또 다른 일부는
태양이나 자신들이 만들어낸 우상들을 숭배하였고 또 어떤 일부는 우리의 타고난 도덕관념에 반하는 외설과 부정행위 그리고 타인에 대한 잔혹함 등에
탐닉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해 지속적으로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그들이 올바른 길을 선택하고
자신의 그릇된 믿음과 방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꾸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동체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인류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모든 예언자들은 동일한 하나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것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바꾸고 왜곡시킨 것은
그들의 자손과 후대 사람들입니다. 한 예로 예수는 의심할 바 없는 진정한 예언자였으나 그의 가르침이 후대
기독교도들에 의해 크게 왜곡되어 그의 본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성서에는 여전히
좋은 말씀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이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완전히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진정한 성서로 간주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꾸란에 언급된 예언자들로는 아담, 아브라함, 노아, 모세, 다윗, 예수 그리고 무함마드(그들 모두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등이 있습니다. 이 중 마지막 예언자가 무함마드이고,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메시지가 바로 꾸란입니다. 꾸란은 인류를 위한 진정하고도 정통성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으로서,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었을 때의 형태 그대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우리 세계관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우리는 또한, 단순하고 원시적인 시대보다 더 복잡한 도구와 기술, 생활
방식 등을 사용하는 것이 꼭 진보의 역사로만 기록되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올바른 길’이라는 기준에 초점을 두고 고찰되어야 합니다. 이 올바른 길이란 본질적으로 조물주를 인정하는 것과 선천적인 도덕관념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어떤 이는 이 곧은 길을 따르며 살아갈 것이고, 다른 이는 곧은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이는 구부러진 길로 빠져 방황하다가 결국 올바른 길을 영영 찾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언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역할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올바른 길, 즉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섬김으로 불러들이는 일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올바른 믿음과 그 믿음에 따른 올바른 행동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구의 사용이나 생산 방식 등의 변화와 같이 단순히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인간과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흥미로울 수는 있으나 그렇게 크게 의미 있는 일은 아닙니다.
꾸란의 세계관
꾸란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과 세계관에 대한 몇 가지 인식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간단한
방법은 꾸란의 첫 장을 읽어 보는 것입니다. 꾸란의 첫 장은 일곱 개의 짧은 절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꾸란의 ‘계시’와 ‘메시지’들로 이루어진 이 절들은 하나님의 하나되심과 창조의 목적을 나타냅니다. 꾸란의 첫 장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부분인 1~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장 자비로우시고 가장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2. 무한한 영광은 온 우주의 주님이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3. 가장 자비로우시고 가장 자애로우신 분.
4. 심판의 날의 주권자.
위 네 절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자,
주인이시며, 왕이자 우리를 부양하시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시고 영광되신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그분의 피조물들에게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날의 주인이십니다. 심판의 날은 인간의 지각으로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함을 알려줍니다. 즉 현세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세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심판의 날은, 인류의 창조에는 어떤 목적이 존재하며,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생명을 부여 받은 데 대해 하나님께 응답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정함과 정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은혜와 은총들에 대한 감사와
찬미는 오직 하나님만이 받으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인 5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5. 저희들은 당신만을 경배하며 당신께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 절은 첫 번째 부분과 논리적 연장선상에 있으며 인간과 조물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즉 어떤
관계가 올바르고 납득 가능한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이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서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을 하는 자는 유일신 하나님 외에 다른 그릇된 신들을 섬기는 것을 그만두어야 하며, 여기에는
자기 자신의 욕망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는 성향들도 포함됩니다.
세 번째 부분인 6-7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6. 저희들을 올곧은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7. 그 길은 당신께서 은총을 베푸신 자들의 길로서, 당신의 노여움을 산 자들의
길도 아니며 방황하는 자들의 길도 아닙니다.
이 두 절은 우리를 부양하시는 조물주로부터 인간이 필요로 하는 가르침과 도움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으며, 하나님을
향한 탄원과 간청으로써 꾸란 제 1장의 끝을 맺고 있습니다.
꾸란의 나머지 부분은 이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꾸란의 길은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며 꾸란의
길은 곧 올바른 길입니다.
꾸란 제 1 장 개경장 (수라툴 파티하) 1. 가장 자비로우시고 가장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
꾸란의 목적 및 내용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꾸란은 “인류를 위한 가르침” 그 자체입니다. 꾸란은
특정 지역이나 특정 시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꾸란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의식하고 인간의 지각 범위를 벗어난 이면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꾸란은 첫 시작 페이지부터 인간에게 총체적인 진실을 대면하게끔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꾸란은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꾸란은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보내진 말씀입니다.
그들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들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 다시 말해 땅과 산, 구름과 하늘, 태양,
달, 궤도를 도는 행성들, 낮과 밤의 교체,
가물던 땅이 단비로 말미암아 파릇한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 등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입니다.
꾸란은 우리 자신의 삶의 시초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주문합니다. 난자와 만나게 되는 한 방울의 정액, 어머니 자궁 내벽에 매달린 수정란, 태아의 성장, 뼈의 생성, 정해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뼈가 살로 덮이고 그에 이어지는 새 생명체의 탄생 등에 대해 숙고해보라고 합니다.(꾸란 제22장 5절 참조). 꾸란은 또한 우리에게 이 새로운 생명체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그 후 늙고 쇠약해져 죽음에 이르게 되는 단계들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합니다. 꾸란은 우리의 눈과 혀, 입술에 대해 관찰하고 생각해 볼 것을 주문합니다. 또 우리가 뿌리는 씨와 우리가 마시는 물,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지피는 불, 그 외 셀 수 없이 많은 창조의 표식(Sign)들과 조물주의 자비와 은총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을 권고합니다.
<이성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진실로, 하늘들과
땅의 창조, 밤과 낮의 교체, 인간에게 득이 되는 것을 싣고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물(비)이 떨어지게 하시어 그것으로써 죽어있던 대지에 생명을 부여하심과 그곳(대지)에 모든 종류의 움직이는 생명체를 퍼뜨리심, 바람 방향의 변경, 하늘과 땅 사이의 순종하는 구름에는 이성을 사용하는 자들을 위한 징표가 있노라.” (꾸란 제 2장 164절) “너희들은, 너희들이
땅에 뿌리는 것을 보았는가?” (꾸란 제 56장 63절) “너희들은, 너희들이
마시는 물을 보았는가?” (꾸란 제 56장 68절) “너희들은, 너희들이 지피는 불을 보았는가?” (꾸란 제 56장 71절) |
꾸란은 시종일관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지각(God Consciousness)에 이르는 올바른 길로서의 지식과 이성을 강조합니다. 지식 있는 하나님의 종들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꾸란 제 35장 28절)
하나님과 창조
우리는 천지창조가 얼마나 방대하고 복잡한 작업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미세하기
그지없고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양자(Proton)와 중성자로부터 광대한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경탄과 경외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우주는 그 규모가 광대무변함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질서정연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꾸란에 따르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볼 수 있는 것만이 진실의 전부는 아닙니다. 관측 가능한 광대한 우주만이 존재하는 것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의 범위를 초월합니다. 꾸란은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지구 창조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영적 존재로 창조된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외에
영원한 내세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의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쭉 뻗은 길 하나를 보면서 그 길 끝 모퉁이에 나 있는 다른 길은 보지 못한 채, 이 큰 길
외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천지창조는 일회성 작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를 창조신 후 쉬시거나
주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셨다면 하나님은 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들을 계속 유지하고 관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멸망시키실 수도 있고 새 생명을 부여할 수도 있으며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실 수 있습니다.
꾸란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안의 모든 피조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태양은
자신의 궤도를 따라 운행하고 있으므로 달을 앞지를 수 없습니다. 모든 천체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에 따라
운행합니다.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기 위해선 햇빛이 필요합니다. 새들과
벌들은 하나님에게서 부여받은 놀라운 방향감각 덕분에 먹이를 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산소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각자에 맞는 특별한 법칙이나 규범을 따르며 살아갑니다. 벌은 바다에서 살 수 없습니다. 물고기는 땅에서 살 수 없습니다. 이들은 각각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에 따라 살아갑니다. 즉 이들 각자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이라는 아랍어의 정확한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복종의 상태, 즉 이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이는 문자 그대로 ‘복종하는 자’라는 뜻의 “무슬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체에 필요한 빛과 따스함을 가진 태양, 궤도를 운행하는 달, 봄에 활짝 핀 수선화, 가을에 땅에 떨어져 또 다시 땅과 하나가 되려는 황금빛 낙엽,
기독교인, 유대인, 힌두교도,
불교도, 이슬람 신자, 혹은 공기를 호흡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모든 피조물들은 근본적으로 모두 하나님의 법칙과 규범에 따라 사는 무슬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한 가지 관점에서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됩니다. 태어나고
살고 죽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점은 같지만, 인간은 우주를 이해하고 자신에 맞게 자신의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부여 받았습니다. 더욱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가르침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타고난 아름다운 천성과 태어난 목적을 거스를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자유 의지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것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슬람적인 삶의 의식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들은
더 이상 다른 피조물들과 같은 수동적인 무슬림이 아닌 능동적인 무슬림이 되는 것입니다.
‘이슬람’은, 꾸란이 묘사하는 세계관과 그 안의 모든 가르침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무슬림은 의식적으로 이러한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그 안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개인의 가장 중요한 특징
이제 여기서 개개인을 구별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본성 혹은 특징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의 특징은 백인인지, 흑인인지,
황인인지 하는 피부색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이 중요합니다. 즉 그들은 상대방이
가난한지 부자인지, 지배자인지 피지배자인지, 압제자인지 박해자인지를
따집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출생지, 언어, 국적 등이 제일 중요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귀족인지, 중산층인지 아니면 노동자 계급인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러한 것들이 아닙니다. 이슬람에서
한 개인의 언어나 피부색 등은 아무런 사회적, 경제적 혹은 정치적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개개인을 식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보여주는 징표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지식과
인식을 가진 사람은 존재에 대한 모든 진실을 접하게 될 때면 자신의 삶을 조물주에 의지하고 조물주를 인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신앙을 아랍어로 “이만(Iman)”이라고 합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알다”, “믿다”, “의심의 그늘에서
벗어나 확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만’은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랍어로 믿는 자를 “무슬림(Muslim)” 혹은 “무으민(Mu’min)”이라고 합니다. 무으민은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그분의 속성, 예언자들에게 계시된 그분의 법칙과 가르침, 그리고 보상과
응벌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법칙을 바로 알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는 진정한 무슬림을 의미합니다.
신앙(이만)이 없다면 완전하고 진실된 이슬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조물주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부정하고, 나아가 조물주의 존재마저도 부정하는 사람들을 불신자라고 합니다.
불신은 아랍어로 “쿠프르(Kufr)”라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뜻은 “감추다” 또는 “속이다” 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은 “카피르(Kafir: 속이는 사람)”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신을 통해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피르는 또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자신의 주인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일인 것입니다. 이 모두는 이슬람에서 그리고 이슬람 신자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인 샤하다(Shahadah; 신앙고백)로 귀결됩니다. 샤하다는 이슬람으로 입교를 원하는 자가 반드시 말해야 하는 아랍어 구절입니다.
샤하다(Shahaadah : ‘라 일라하 일랄라’(하나님 이외에는 경배 받을 존재가 없다), ‘무함마둔 라수룰라’(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도이다)
“샤하다(Shahaadah)”는 아랍어로 “증인” 또는 “증언”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샤하다의 첫 부분은 단 네 단어의 아랍어로 표현됩니다. “라 일라하 일랄라(Laa ilaaha illallaah)”, 즉 ‘하나님 이외에는 경배 받을 존재가 없다’는 뜻입니다.
“라 일라하 일랄라”의 문장 구성은 매우 단순하지만, 그 뜻을
살펴볼 때면 상당히 심오하고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문장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어 사용되는 말일 것입니다. 이 문장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부정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입니다.
첫 번째 부분 – 라 일라하(Laa ilaaha) (경배 받을 존재가 없다)
– 은 거짓된 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우상 숭배를 비난합니다. “일라(ilaah)”라는 말은 ‘신’ 또는 ‘숭배를 받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며, 사람이건, 물체건, 이념이건 간에, 그것이 사랑의 감정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두려움과 경외심에서 나온 것인지에 상관없이 숭배와 신앙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지칭합니다.
무지의 시대에 사람들은 태양, 달, 나무, 돌, 불, 지배자, 예언자, 성직자, 랍비, 성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또한 꾸란에서 경고하듯(25:43), “일라(ilaah)”는 우리의 변덕과 욕망을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변덕스러운 감정과 열정에 완전히 굴복한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감정과 격정을 숭배하고 그것들을 신으로 삼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예로 자만심과
허영심은 자칫 우리의 “신”이 되어 철저히 이기적인 행동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우리의 타고난 도덕성과 책임감을
짓밟고 유린할 수도 있습니다.
꾸란은 “쉬르크(shirk)”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것을 하나님과 대등하게 두고 이를 숭배하는 행위인데 가장 극악무도한 행위로서 “엄청난 부정”이자 “최악의 죄”이므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꾸란은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풀기를)에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중대한 죄가 무엇인지를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를 두는 것,
즉 쉬르크(shirk)”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쉬르크가 그토록 중죄인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은총과 자비를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샤하다의 두 번째 부분 - 일랄라(illallaah)(하나님 이외에는) – 은 유일무이한 신이자 조물주, 모든
존재의 지지자를 뜻하는 아랍어인 ‘알라(Allah,하나님)’만이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그분의 가르침만이 진정으로 따를 가치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타우히드(Tawheed)
“하나님의 하나되심을 말하거나 증언하는 것”을 일컫는 아랍어 단어로는 “타우히드(Tawheed)”가 있습니다. 타우히드란, 창조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선언하고 동시에 그분 한 분 만을 경배하는 한편 그분과 유사한 이름과 속성을 지닌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타우히드는 세 개의 큰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1. 전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통제자이신 분은 하나님 오직 한 분이라는 것을 믿고 확증하는 것.
2.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분께 복종해야 함을 선언하는 것.
3. 그 분의 이름과 속성은 유일무이하며 그분과 유사한 존재가 없음을 확증하는 것.
이는 의식 있는 무슬림들의 세계관의 기초를 이루며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우히드는 가장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시며, 사랑과 용서와 전능과 공정함으로 모든 영광과
찬양을 받아 마땅하신 하나님에 대해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타우히드는 또 강력한 해방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타우히드는 그릇된 신들을 숭배하는 것으로부터
인류를 자유롭게 합니다. 또한 타우히드는 독재자의 억압과 압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데, 피조물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을 수반할 때, 타우히드는 그러한 피조물에 대한 복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타우히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직접적인 유대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사제 및 성직자들의 중재와 간섭, 혹은
성인들에 대한 숭배행위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킵니다.
타우히드는 인간의 정신과 양심을 온갖 종류의 미신과 환상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점쟁이나
주술, 마법 등의 악마의 손아귀로부터 인류를 구해 줍니다.
또 타우히드는 자기기만, 자만 및 자족감에서 오는 오만함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킵니다.
따라서 타우히드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과 개인의 존엄 및 자유를 독특한 형태로 혼합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사도
이제 우리는 무슬림들의 증언인 샤하다의 두 번째 문장(‘무함마둔
라수룰라’ :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도이시다)에 이르렀습니다.
이 부분은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사도라는 것을 선언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선언이 진정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며, 이것이 우리 인류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위에서 언급된 샤하다는 다음의 사항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1. 예언자 예수로부터 6~7세기 이후에 살았던, 무함마드라 불리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2. 그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도록 선택된 하나님의 예언자인 동시에 이전 예언자들의 임무를 최종적으로
완결 짓는 마지막 예언자이다.
3. 그의 임무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
무함마드 이후로는 예언자가 없습니다. 이는 그에게 계시된 꾸란이 하나님의 완전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꾸란을 통해, 꾸란이 계시된 그대로의
형태로 영구 보전될 것이라고 인류와의 성약을 맺으셨습니다. 즉 꾸란은 이전에 존재했던 다른 성서들처럼 바뀌거나
왜곡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꾸란은 계시되었을 때 그대로의 상태로 보존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유일무이하고 진정한 진리의 가르침이자 진실의 매개체로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사도라고 말하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을 선언하는 것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샤하다는
이슬람이 삶의 체제이자 방식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슬람을 삶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예언자 무함마드를 모범으로 삼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꾸란이 하나님의 말씀이 구현된 그분의 마지막 성서라면,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의
삶과 그가 인류에 보여준 모범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행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께서
보여주신 본보기의 중요성은 꾸란에서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사도에게는 그대들을 위한 훌륭한 모범이 있으니 (그 모범은)
하나님과 최후의 날을 바라고 하나님을 많이 기억하는 자를 위한 것이라.” (꾸란
제 33장 21절)
“...사도가 그대들에게 준 것은 받고 그가 그대들에게 금한 것은 멀리 하라...” (꾸란 제 59장 7절)
예언자 자신도 자신의 임종 직전 아래와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두 가지를 남겨두니 만일 그대들이 이를 굳건히 지킨다면 절대 방황하지 않을
것이라. 그것은 하나님의 책(꾸란)과 내가
보여준 모범(순나)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꾸란에 기록되어 있으며, 예언자의 모범인 순나는 하디쓰(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 모음집에 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디쓰의 구성 요소는 예언자의 행동, 예언자의 말씀, 그리고 예언자가 동의한 타인의 언행 이 세 가지이며 무슬림은 하디쓰를 통해, 꾸란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 실천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메시지와 방법
자으파르 이븐 아비 딸립(Ja’far ibn Abi
Taalib)이 아프리카의 아비시니아 왕에게 들려준 이야기에는,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임무와 삶의 방식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언자의 교우 중 몇몇 무슬림들은 메카 불신자들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홍해를 건너 아비시니아로 피난을 떠났고 자으파르는
그 무리의 대변인으로서 아비시니아 왕 앞에 섰습니다.
“오, 왕이시여,” 그가 말했습니다. ‘과거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며, 죽은 동물의 살을 뜯어 먹고, 추악한 일들을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또 친족들을 돌보기를 게을리하고 이웃에게 죄를 저지르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무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우리 중 한 명을 사도로 선택하여
그분의 말씀을 보내셨는데 그의 성실함과 정직함, 믿음직한 성품은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불러모아 유일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우리와
우리 선조들이 일삼던 우상 숭배를 그만둘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진실된 말을 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가족과 친족들을 보살피고, 이웃을 친절히 대하며, 피를
먹거나 부정한 음식을 섭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수치스러운 행동이나 거짓된 말을 금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를 두지 말며 예배를 드리고 희사금을 낼 것을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진실하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를 믿고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예언자의 임무 및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한 자으파르의 말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할 요점은 바로 타우히드(유일신론)의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타고난 곧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신앙을 갖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이 지식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와 권위를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타우히드는 정확한 행동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가 제시한 이러한 지침, 즉 ‘신앙은 행위의 출발점’
을 알아볼 수 있는 예로, 그의 아내 아이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아이샤에 따르면, 예언자께서는 술을 마시거나 간음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먼저 말을
꺼내시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먼저 말문을 여셨으며 청중들이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진 후에야 비로소 술을 마셔서는 안되고 간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으며, 따라서
그의 교우들은 그의 말씀을 어려움 없이 잘 따를 수 있었습니다. “만일 예언자께서 (교우들이 신앙을 갖추기 이전에) 술을 마시지 말고 간음을 하지 말라는 명령부터 내리셨다면,
우리는 아마도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꾸했을 것입니다.”
자으파르의 말에서 우리는 예언자께서 정직, 친절, 관용, 공정함 등과 같은 모든 내재적인 도덕 가치들을 장려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는 모든 혐오스러운 것과 거짓 증언, 파렴치함, 무지, 압제 등을 비난하셨습니다.
또 자으파르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예언자의 진실함에 대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무함마드는
예언자가 된 후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그는 항상 진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확고부동한 명성을 누렸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각각
앗-싸디끄(As-Sadiq:) 및 알-아민(Al-Ameen: 믿을 만한 자)이라고 불렸습니다.
무함마드의 아내 아이샤가 “그분의 성품이 곧 꾸란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사실
그의 내면에는 이미 예언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자격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언자를 부정하는 것은 꾸란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며 꾸란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유사 이래 어떠한 인간도 자발적이건 비자발적이건 간에 그토록 숭고한 목적에 스스로를 구속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는 그 목적 자체가 인간의 능력을 이미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이란 인간과 그의 조물주 사이를 이간하는 미신을 타파하고, 하나님을 인간에게로,
인간을 하나님에게로 되돌리며, 물질적이고 왜곡된 우상들이 범람하는 혼돈 속에서 합리적이고
성스러운 신성(神性)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인간도 그토록 미천한 방법으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임무에 착수한 바 없었으니, 그(무함마드)는 그러한 위대한 뜻의 착상뿐 아니라 그 실행에 있어, 그 자신과 사막 한 구석에 살고 있던 한 무리의 교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도구와 원조에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인간도 그토록 거대하고 지속적인 혁명을 달성한 적은 없었습니다.”
“목적의 위대함과 물리적 수단에의 낮은 의존도, 그리고
놀라운 성과가 인간의 천재성을 판가름하는 진정한 기준이라면 인류의 근대 역사상 어느 누가 무함마드에 필적할 수 있겠습니까? 유명한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무기, 법률, 왕조를 시작한
사람들이 고작이고, 그러한 것들은 종종 사람들의 시야에서 곧 무너져 사라지고 마는 물질적인 힘에 불과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백성과 군대, 왕조 및 제국을 움직였을 뿐 아니라,
인간이 거주하는 지구의 삼분의 일에 달하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움직였으며 더 나아가 제단과 거짓 신들을 타파하고,
종교, 사상, 신념 그리고 수많은 영혼을 움직였습니다.
글자 하나 하나가 법이 되어버린 단 한 권의 책을 토대로, 그는 모든 언어와 인종이
하나가 된 정신적인 국가를 탄생시켰습니다. 무슬림 국가의 영원한 특징으로서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거짓
신에 대한 증오와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열정입니다. 전 지구상 인구의 3분의 1이 이슬람의 교리를 따르게 한 것은 진정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것은 한 인간의 기적이 아니라 이성(理性)이 이루어낸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삶, 그의 명상, 그의 나라에서 널리 퍼져 있던 미신들에 대해 통렬한 비판, 그리고 그 당시 맹위를 떨치고 있던
우상 숭배의 관행에 대한 용맹한 도전, 메카에서의 13년을 견뎌내며
보여준 확고부동한 결의, 민중의 조롱과 냉소, 그리고 같은 핏줄으로부터의
핍박을 감내한 강한 인내심, 이 모든 것들을 겪은 후에 단행한 메디나 이주, 그리고 그 곳에서의 쉼 없는 설교, 역경 속에 치른 전쟁들, 성공에 대한 신념, 온갖 재난과 불행을 극복한 초인적 생존, 승리를 위한 인내, 제국이 아닌, 단 하나의 사상을 위한
그의 전력투구, 그의 패기와 끊임없는 기도, 하나님과의 신비한 대화,
그의 죽음 및 그 후의 승리 – 이 모든 것들은 그의 신념을 더욱 공고히 하였고 그의 강한 신앙심으로 인해 이슬람의 메시지는
흔들림 없이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철학자, 연설가, 사도, 입법가, 전사, 사상의 정복가, 합리적 교리와 성상 없는 제식(祭式)의 복구자, 스무 곳의 육상 제국을 건립하고, 한 곳의 정신적 제국을 세운 자, 그가 바로 무함마드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을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기준들을 고려해보아도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과연 그보다 위대한 사람이 있는가?”
(프랑스 학자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 1854년,
터키의 역사(Histoire de la Turquie)
우리는 이제 꾸란의 중요성과,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타당한 세계관을 형성함에 있어 예언자 무함마드(그분에게 평화가 깃들기를)가 보여준 모범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꾸란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최후의 메시지이기에,
그리고 무함마드 이후에는 예언자가 존재하지 않기에, 꾸란의 의미 및 꾸란이 우리
삶에 가지는 의미를 발견, 혹은 재발견하는 것은 특히 중요한 일입니다. 동쪽에 살든지 서쪽에 살든 지 또는 남쪽이든지 북쪽이든지, 소위 선진국에 살든지 개발도상국이나
빈국에 살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젊은 사람이든지 늙은 사람이든지,
꾸란은 그들 모두를 위한 메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즉 꾸란은 당신을 위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꾸란의 내용과 꾸란이 인간들에게 갖는 의미를 잠깐 들여다보았을 뿐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되심과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섬겨야 하는 인간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 삶의 목적, 그리고 인간에게 열린 다양한 선택의 기로와 운명에 대해 꾸란이 무어라 이야기하는지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의 본성
이슬람의 세계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남자와 여자)을 창조하실 때 선천적으로 선하고 죄가 없는 순수한 상태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아랍어로 “피뜨라(인간의 창조본성, Fitrah)”라고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완전히 순수합니다. 갓난아기는 부모나 조상의 죄악을 짊어지지 않은, 완전히 깨끗한 상태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는 종교(이슬람)를 위해 그대의 얼굴을 굳건히 하라. (그 종교는) 하나님께서
두신 창조 본성(피뜨라)으로, 그분께서는 인간을 ‘피뜨라’의 상태로 창조하셨노라.
하나님의 창조에 변질이 있어서는 안되노라. 그것이 올바른 종교이나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하더라.”
{꾸란 제 30장 30절}
예언자 무함마드(그분에게 평화가 깃들기를)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아이들은 피뜨라(Fitrah)의 상태 즉 무슬림으로 태어나노라.
그러나 부모가 그들을 유대인, 기독교인 또는 조로아스터교인 (불을 숭배하는 자)으로 변화시키노라.” (부카리가
전함)
주해: 이 하디쓰에서 “부모” 라 함은 “사회적 영향” 또는 “환경”과 같은 보다
폭넓은 의미를 갖습니다. 위에 언급된 종교들은 예언자 당시의 가장 잘 알려진 종교들로, 인간의 내재적이고 선천적인 기질을 앗아가는 다른 종교나 세계관으로 대치 해석될 수 있습니다.
선과 악
인간은 진실 및 선과 거짓, 악을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내재적인 도덕관념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선”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인간에게도 이로운 모든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악”은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해로운 모든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천적으로 선한 상태로 창조하기는 하셨지만, 그분께서는 또한 인간에게
선과 악 모두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행과 악행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선과 악의 존재는 따라서, 인간이 선택하는 자유 및 행동에 대한 책임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악은 인간의 의도와 행동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악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악에
대한 책임이 없으십니다.
태어날 때와 같은 순수하고 죄 없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주된 임무는 악을 피하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꾸란에서 타끄와(Taqwa;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타끄와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한계를
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악과 유혹에 대한 방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타끄와를 잘 유지함으로써 인간은 그가 타고난 창조본성의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자신이 타고난 선한 본성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러한 본성을 지킨다는 것이 종종 힘든 일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은 인간 특유의 나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같은
나약함을 꾸란에서는 아랍어로 “다으프(da’f)”라고 칭하고 있으며
“옹졸함” 또는 “좁은 마음”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선한 본성을 따르고
선한 의도와 행동을 통해 이 착한 본성을 공고히 해나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스스로 어리석은
생각을 하며 또한 다른 우매한 피조물에 의해서 나약해지고 마음이 편협해지기도 합니다. 이는 자만이요,
이기심이요, 타인에 대한 증오심이요, 또 다른
형태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탐욕과 약탈, 파괴,
강탈전과 같은 또 다른 형태의 불공정함이 발생합니다.
악에 탐닉하면 할수록 인간의 순수한 마음은 녹슬어 악에 파묻히게 되고, 결국에는
그 어떤 좋은 것도 그 닫힌 마음에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기
전이라면, 아직은 참회와 선행을 통해 본래의 선한 본성으로 “회귀”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꾸란의 용어 ‘타우바’(Tawbah; 회개)가 뜻하는 것으로, 자신의 본래의 선한 상태로 회귀함을
가리킵니다. 이슬람이 죄지은 자들에게 주는 기본 조언은 타우바를 하라는 것입니다.
자유와 책임
우리는 인간이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절망과 좌절 속에 살도록 헛되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을 섬기는,
숭고하고도 자연스런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적 능력을
부여하시고 지구를 관리하는 하나님의 “칼리파(Khalifah; 계승자)”가 되는 영광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보다 고결하고 위대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칼리파가 됨으로써, 인간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특별한 역할과 책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신뢰, 즉 “아마나(Amanah)”를 통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인간의 책임 안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 같은 신뢰는 인간에게 하나님께 의지하고 자신의 본래의 순수함 및 다른 피조물과의 조화를
지켜나가며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와 같이 우주의 조화를 위해 일할 때 그는 완전한 의미의 무슬림이
되며 주위에 이익을 주는 존재가 됩니다. 반면에 인간이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게 되면 불화와 불합리,
죄악이 발생하게 되며, 그는 곧 사악한 존재가 됩니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자유를 얻은 덕분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의 의무도 함께 가지게 되었습니다.
미래의 삶
지혜로우시고 공정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세상의 고결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을 똑같이 대하실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심판의 날과 내세가
있음을 믿는 것은 당연하고도 타당한 것입니다. 인간의 의무와 책임은 꾸란의 주된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꾸란에서는 내세가 바람직하고도 또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선한 자들이 보답을 받고 악한 자들이 벌을 받는 내세가 없다면 정의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여 그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고, 인간의 책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예언자들을 보낼 이유도 목적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장난으로 창조하였다고 생각했던가? 그리고
너희들이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가?” (꾸란
제 23장 115절)
꾸란은 내세 및 부활에 대해, 만일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그분께서
죽은 인간을 재창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후의 삶도 이슬람의 세계관에 있어 중요한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짧은 설명을 통해 우리는 꾸란이 현실에 대한 포괄적이고 조화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본성과 우주의 본질,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꾸란은 인간에게 열려 있는 다양한 선택의 기로와 운명을 제시합니다. 꾸란은 선과 악의 본질을
다룹니다. 또 개인의 행복과 불만의 원인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사회와
문명에 대해 논하며, 문명의 발생, 쇠퇴와 몰락 및 그 이면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서도 지적합니다. 꾸란은 인간에게 자신의 본성과 책임을 명심하고, 영원한 평화와 기쁨이 있는 내세를 믿을 것을 촉구합니다. 꾸란은 또한 하나님이 지정하신 한계를
넘어서는 자가 겪게 될 고통과 응벌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꾸란은 단순한 보편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삼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꾸란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선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꾸란은 또, 어떠한 과정을 통해 개인과 전체의 존립이 파괴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은 이러한 꾸란의 덕목을 통해 그 실체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샤리아’(Sharee’ah)라는 이슬람법에는 생활 속에 당장 실천 가능한 상세한 법률 사항 뿐만 아니라, 합법적인 것과
금지된 것들을 규정하는 확고하고 포괄적인 원칙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샤리아가 금지하는 모든 것들은 인간과
사회, 그리고 환경에 유해한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이슬람은 오늘날의 개인과 인류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이 제시하는 해답은 당장의 문제에 대한 일련의 해결책이 아닌, 모든 인간을 현세와 내세에서의 선(善)으로 인도해
주는 자연스러운 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길은 진실을 알고자 하고 그 진실에 따라 삶을
가꾸어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언제든지 다가갈 수 있는 열린 길입니다.
“그리고 동쪽과 서쪽이 하나님께 있도다. 너희들이 어디를 향하든 그곳에는 하나님의 얼굴이 있노라.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우르시는 분이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라.” (꾸란 제 2장 115절) <끝>
0 Comments